세계는, 인류는, 문명은 순식간에 백 년씩 거꾸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럴 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견뎌야만 한다. 같은 장소에서 언제나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지금이 그리 좋지 않은 시대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디선가 다정한 대화들이 계속되고 있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버릴 수가 없다.
사실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언젠가 한번은, 아주 평범한 거리를 열심히 사진으로 담는 관광객을 본 적이 있다. 작은 카메라에 대체 무엇을 담는지 궁금해서 나도 그 방향을 쳐다보았는데 특이할 게 없는 상가 건물들일 뿐이었다. 관광객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망으로 정보들을 건져내는 것 같고 그 시선에 매료될 때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을 언제까지고 두려워할 것이다. "그놈들 머리에 폭탄이 떨어지면 좋겠어!"라든가 "그놈들 발밑에 지진이 나면 좋겠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가장 순정한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것을 외면하는 독선은 얼마나 독한가?
일단은 조롱과 비아냥, 일반화를 피하려고 노력한다. 복잡하게 얽힌 세계에서 한 사람을 덩어리로부터 떼어내 개별적으로 보고싶다. 사회적 맥락과 개인을 동시에 온전히 이해하는 것, 내가 쓰는 언어의 요철을 없애면서도 예각을 잃지 않는 것. 그 지난한 두 가지가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인 것 같다.
사람들의 공격성이 공기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이 지구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마음속에 환상이 자라날 때 독일의 그 날카로운 파편들을 떠올리고만다. 어린이가 넘어지면 여린 살을 파고들지도 모를, 산책하는 강아지에게 아주 나쁠, 작게 부스러진 후엔 강풍에 날아올라 눈을 찌를 파편들을. 그러면 존재하지 않는 곳을 찾아 헤매기보다 지금 이곳을 지키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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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따뜻한 시선을 닮고 싶다. 바깥세상에 다툼과 미움이 잦을지라도 그 와중에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나누는 따뜻한 말과 마음, 다정한 포옹이 있기 마련이다. 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들을 한 사람이 아닌 덩어리로 생각하는 습관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아는데도 그런 못된 말이 나온다. 그런 독한 독선은 저지르지 말아야지. 조롱, 비아냥, 일반화를 의식적으로 피해야지. 자극적으로 머릿속을 헤집는 것들에 집중하지 말아야지. 모든 존재는 누군가에겐 소중한 존재다. 나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강아지들도, 고양이들도, 모든 것들이. 요런 생각을 조금만 마음에 담아두면서 따뜻한 시선을 얻고, 냉소는 좀 덜어낼 수 있길.
언젠가 메트로폴리탄에 세 번째로 간다면, 두 번째로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오는 날에 가고싶다. 전시관과 전시관 사이의 빗물이 흐르고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유리창이 아름다워 낮게 한숨 쉬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어떤 풍경에 반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한숨을 아는지?
지구는 45억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아무렇지 않게 찍은 사진이었고 금방 그 자리를 떴지만 뉴욕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그 이미지를 자주 떠올리게 된 것은 예상 밖이었다. 사진을 찍던 순간을 떠올리면 슬쩍 웃을 수 있고, 숨을 돌릴 수 있고, 뭐든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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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나도 같이 여행하는 느낌이었다. 작가님의 시선을 따라 같이 보고 같이 느끼는 그런 여행.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비 오는 날을 묘사한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흠- 하고 한숨을 쉬었는데, 바로 뒤에 작가님도 한숨을 쉬었다는 문장이 나와 깜짝 놀랐다. 정말 풍경에 반했을 때 나오는 그런 자연스러운 한숨을 쉬었기 때문에!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도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이 그려졌던가보다. 그런 아름다운 순간과 장면들은 매일매일 있다고 생각한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하고자 하는 노력을 꽤나 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책에 딱 내가 생각하는 문장이 나와 신기했다. 운동을 가면서나 피아노를 치러가면서, 좋은 날씨와 공기, 나무 냄새, 비 냄새, 산책하는 강아지, 돌아다니는 고양이, 참새들, 가로수의 나뭇잎, 구름, 달을 본다. 하루 중에 길지 않은 그 순간이 마음에 주는 여운은 길다.
스물두 살의 친절한 P가 그렇게까지 아픈 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너무 젊은 사람, 선한 사람, 가능성을 채 확인하지 못한 사람도 아플 수 있다는 걸 안다. 불행은 완전한 우연으로 찾아온다는 걸 이해한다. 알고 이해하면서도 영 무뎌지지는 못하고 있다.
완벽한 작품은 존재하지 않고 작품 안팎의 논란도 늘 있지만, 해리포터를 읽고 자란 이들이 더 관용적이고 폭력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는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이야기가 가진 아주 투명하고 여린 힘, 읽는 이의 영혼에 밝은 지문을 남기는 능력에 대해서 멈추어 생각할 때가 있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 더더욱 자주 로알드 달의 말을 떠올린다. "친절함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용기나 대담함이나 너그러움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친절함이 말이다.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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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함은 소중해. 친절함은 마음을 뜨듯하게 덥혀주는 연료가 된다. 낯선 나라에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 잔뜩 긴장해서 경계태세를 힘껏 갖추고 도끼눈을 뜬 채로 숙소로 부랴부랴 가던 와중에 우연히 마주친 친절함이 긴장으로 차가워진 맘을 녹인다. 친절함이 한 개인을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한다. 서로의 안부를 궁금하게 하고 혹여라도 아프다 하면 걱정하게 한다. 나는 특히나 쉽게 맘이 누그러지는 편인 것 같다. 애초부터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첫인상에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면서, 또 그 첫인상이 바뀌는 경우가 나에게는 많이 일어난다. 그게 친절함이 만드는 차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나도 최대한 친절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한테 친절함을 베푸는 게 사실은 나에게도 베푸는 것이라는 걸, 내 영혼에 밝은 지문을 꾸욱 꾸욱 남기는 것이라는 걸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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